Criticism - Jang Boyun



‘어떤 사람이 봤을 법한 평범한 광경’

[1]

이연숙(리타)


내가 장보윤 작가의 작업을 맨 처음 본 것은 리움 미술관에서 열린 《아트 스펙트럼 2012》에서 였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총 350여장의 주인 없는 사진을 수집한 뒤 사진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경주’라는 장소를 전경화한 작업 <천년 고도>를 선보였다. 70-80년대 경주는 수학 여행, 신혼 여행, 가족 여행의 필수 코스였다. 알다시피 ‘그’ 경주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관광지로서 전성기였던 경주가 쇠락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만 사진 매체 자체가 현존의 부재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부재는 <천년 고도>의 일부인 사진 속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겪은 적도 없는 과거를 애틋한 노스탤지어로, 혹은 섬짓한 예감으로 감각하게 한다. 사진은 무엇을 찍건 간에 찍는 순간 즉각 ‘바로 지금’이라는 현재로부터 떨어져 나와 더 이상 ‘여기 없는’ 과거를 표시하는 매체다. 이처럼 사진이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과거-현재 간 시차는 주지하다시피 ‘기술 복제 시대’ 이후 ‘민주화’된 예술의 아우라가 잔존하는 시공간을 개방하기도 한다. 즉 시차의 시간성과 물질성으로 인해 사진에는 우리가 끝내 해석의 영역으로 환원할 수 없는 잔여 또는 잉여가 끊임없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천년 고도>에서 결코 원형으로 복원될 수 없을 과거의 ‘잔해’에 대한 “환상이나 상상”[2]을 통해, 허구와 사실 사이에서 어쩌면 존재 했을지도 모르는 일종의 반(反)역사로서의 ‘가능 세계’를 펼쳐 보였던 장보윤은, 이번 금천예술공장에서 진행한 두 작업에 있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한다. 2021년부터 진행 중인 <블랙 베일 Black Veil> 연작은 파독 간호사들의 삶에 대한 “공식화된 서사”[3]로부터 버려지고 잊혀진 “또 다른 이야기들”을 다룬다.

<블랙 베일> 연작은 먼저 파독 간호사의 실제 삶에 기초한 편지 형식의 대본을 한국에서 거주하는 해외 유학생 배우가 마치 대독하듯 낭독하는 영상, 그리고 파독 간호사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증언과 같은 사료를 허구적으로 재구성해 과거와 현재의 시점을 넘나드는 여러 형식의 ‘조각’ 글로 짜깁기한 출판물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흔히 언론에서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끌어 낸 주역이자 파독 광부와 마찬가지로 외화 벌이를 위한 수출 노동자로 잘 알려진 파독 간호사의 삶은, <블랙 베일>이 점유하는 “역사와 개인, 기록과 기억 사이”라는 완전히 채워질 수도 좁혀질 수도 없는 ‘틈’이라는 공간 속에서 어렴풋한 ‘누군가’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이름도 얼굴도 없지만 배우의 입을 빌려, 그리고 작가의 글을 빌려 출현하는 이 ‘누군가’의 목소리는 이를테면 대문자 역사가 망각한 그것의 “그림자”, 즉 유령의 목소리다. 유령은 실체가 없고, 단지 『햄릿』에 대한 자크 데리다의 독해가 그러하듯 단지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상대의 응답 가능성(responsibility)을 요구할 뿐이다.

장보윤에게 이러한 응답 가능성이란 과거에 대한 가능한 사실로서 주어진 사료와 증언라는 한계 끝에서 유령과 같은 타자에 대한 감정 이입을 감행하는 능력과도 같다. 삶과 죽음의 통로 역할을 하는 ‘영매’처럼 작가는 작업을 통해 공식적, 지배적 역사 서술의 언어로는 통약될 수 없을 과거의 재현 불가능한 “푸티지(footage)”[4]를 일종의 허구적, 대안적 사실의 형태로 유출한다. 가와다 후미코의 책 『빨간 기와집』[5]이 다루는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의 삶에서 출발한 작업 ‘오키나와’ 연작 역시 이러한 시도의 연장선에 있다. 1943년 오키나와현 도카시키 섬에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배봉기는 오키나와에서 강제 추방되지 않기 위해 한반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자신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임을 증언해야 했던 인물이다. 1975년 당시 일본 사회 내에 배봉기의 증언이 가져다 준 파장과 충격에도 불구하고 전후 이데올로기로 인해 그의 이름은 특히 남한 사회 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여성학자 김신현경은 배봉기를 하위 주체인 ‘서발턴’으로 간주하고 그의 삶과 죽음이 어떻게 ‘침묵’ 속에 잠기게 되었는지를 분석한 바 있다.[6] 그의 죽음 이후에는 주검을 둘러싸고 민단과 조총련이 그의 삶과 죽음을 정치적 프레임 안에서 자원화하며 “‘대신 말하기’의 정치를 활성화”했기에 그의 삶을 ‘다르게’ 재현할 가능성 또한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7]

나는 지금 사이디야 하트먼의 ‘비판적 우화(critical fabulation)’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8] 그는 노예제에 대한 공식적 아카이브라는 고통스러운 유산과 함께, 그리고 그것에 ‘반해’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나 말해졌을지도 모르는 것이나 행해졌을지도 모르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보자고 주장한다. ‘오키나와’ 연작은 전쟁, 국가, 남성 폭력의 ‘피해자’나 ‘생존자’로서의 ‘공인된’ 이름 너머 어쩌면 배봉기가 언젠가 발견했을지도 모르는 오키나와의 ‘평범한’ 풍경을 ‘상상’하게 만드는 입구처럼 작동한다. 장보윤은 무정하리만치 침묵을 지키는 듯 보이는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풍경과 간간히 웃고 떠드는 사람(들), 멋대로 자란 식물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 중에서도 내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은 주렁주렁 열린 바나나였다. 『빨간 기와집』에서 배봉기는 “산에 가면 과일이 지천인 데다 입을 벌리고 나무 밑에 누워 있으면 그것이 저절로 입으로 떨어진다던”[9] 감언에 속아 도카시키 섬으로 향했다. 당시 배봉기의 소망을 이제와 실현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찍힌 바나나의 사진을 보며 나는 오늘날 사진이란 망각된 타자의 목소리를 ‘지금 여기’에 불러 들이는 매체일 뿐만 아니라 타자를 ‘위한’ 허구적, 제의적 공간을 마련하는 행위의 매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이 봤을 법한 평범한 광경”은 거대 서사 속에서 유일한 판단 중지의 순간으로 출현한다.


[1] 작가와의 대화 중 작가가 한 말.
[2] 장보윤, 『다시 이곳에서: 마운트 아날로그』, 미디어버스, 2016, 56p.
[3] 장보윤, 『블랙 베일 Black Veil』, 32p.
[4] 같은 책, 32p.
[5] 가와다 후미코, 오근영 옮김, 『빨간 기와집: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 꿈교출판사, 2014.
[6] 김신현경, 「배봉기의 잊힌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 포스트식민 냉전 체제 속의 ‘위안부’ 문제」,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2024.
[7] 같은 책, 264~265p.
[8] 사이디야 하트먼, 정규식 옮김, “두 행위의 비너스(2)”, 웹진 인-무브.
[9] 『빨간 기와집: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 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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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Jang Boyun


검은 너울 너머 낭독하는 울음


(Crying Recital Beyond the Black Veil)


2023년 장보윤에게 보내는 글
백필균


나는 필자입니다. 이미지를 옮기는 글쓰기에서 시각 언어와 문자 언어가 교류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베를린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의 글에서 그곳의 이름을 읽었습니다. 같은 글을 여러 차례 읽은 내게 그곳은 여전히 낯설지만 앞으로 가고 싶은 장소입니다.
이제 블랙 베일에 관한 평론을 적겠습니다.

# Curating 01
나는 본 원고가 출발하는 첫 문장과 문단에서 장보윤의 [블랙 베일 2](2023) 영상물 도입부에 출연자가 쓴 대사 양식 일부를 빌린다. 장보윤이 섭외한 이소영 배우는 해당 시퀀스에서 스스로 슬레이트 박수를 치며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다. 이름, 직업, 경력 등 출연자의 역할 정보와 함께 대본에서의 배경인 베를린과 자신을 잇는 사연-그곳에서 1년 동안 남편과 거주했으며 호감이 남아있음-을 스스로 밝힌다. 이어서 출연자는 ‘블랙 베일’ 대본을 읽겠다고 선언하고 조명은 잠시 암전한다.
뒤이은 대사와 블랙 베일 인쇄물(2023년 부천아트벙커 전시물)은 1963년부터 1980년까지 대한민국 2만여 명이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해 서독으로 파견된 현장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경이, 주남, 한진,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살피는 장보윤이 1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장보윤은 전체 원고를 구성하는 토막 글 마다 성격에 따라 카드(Karte), 포스트-카드(Postkarte), 아티클(Artikel) 이상 세 이름 가운데 하나를 붙인다. 카드는 장보윤이 여러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한 주관적 작문과 어울린다. 포스트-카드는 운율이 흐르는 산문과, 아티클은 보도기사 등 출처가 알려진 자료문과 어울린다. 이는 각 글마다 미리 함유한 특징이라기보다 관계적 성격이다. 역사적 기록에 권위를 반추하는 자료로서, 미시적 서사에 위계를 전복하는 단서로서, 허구적 소설에 진실을 발견하는 도약으로서, 영상 몽타주와 유사하게 서술된 파편 여럿이 병립 나열한다.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하는 예술과 인류학, 분야와 분야를 통섭하는 프로젝트 계보가 나아가는 연장에서 장보윤의 ‘블랙 베일’ 연작은 내서니엘 호손의 소설에서 검은 천을 얼굴에 드리운 목사의 일생처럼 보편적 도덕보다 새로운 심연을 생각하게 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에서 파독 노동자를 조명하는 방법과 형식에 있어서 서로 다른 매체마다 같은 ‘결’을 맞추는 때이다.

# Crying 02
“내가 지금 내 주위를 둘러보니, 아! 모든 사람이 얼굴에 검은 베일을 쓰고 있군요.” 내서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목사의 검은 베일』, 김명수 역(2023), 올리버 북스

# Curating 02
장보윤의 글쓰기는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을 전유한다. 발생한 사건과 사료 너머 사실과 허구가 자유로운 문맥에서 서로 어울리게 하는 방법으로서, 장보윤의 작업은 유효하다. 쇼트와 쇼트를 배열하는 특정한 영화 문법을 따라 글 토막과 토막을 연결하는 편집 기술은 같은 주제의식에 기반한 ‘덩어리’ 여럿이 얽히는 복합체이자 이를 다시 해체하는 산물이다. 그의 실험은 서술 여럿에 또 다른 맥락을 다시 구축한다. 재맥락화는 누군가에게 일종의 기회일 것이다. 기존 체계에 대응하는 민주주의적 태도와 비교적 가깝고자 위와 같은 설계를 참조하는 나 또한 본문을 임의의 세 유형(Crying, Curating, Critics)으로 나눈다. 블랙 베일 원고와 이 본문에서 어떤 문장은 앞서 나눈 유형 둘 이상이 겹치는 교집합에 종속하고, 어떤 문장은 세 유형 어느 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 총합이 이르는 범위를 벗어나는 그것은 해설보다 노래에 가깝다.

# Critics 01
예술에 관한 글쓰기는 이미지를 드러내는 기술로써 대상을 문자 언어로 서술하는 형식에 결백하지 않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빚져있다. 나는 상대가 지닌 특정한 문체-감각 및 인지 영역을 아우르는 독특한 형식-번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옮긴다. 이러한 내 습관과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 일을 그간 유보해왔는데, 이번 평론이 위 질문에 상응하는 답을 찾는 특별한 계기로 나아갈지 지켜보고 싶다. 다른 평론 작업과 아울러 문체를 전이하는 방식을 고민하면서 쓴 아래 본문과 그 형식은 상대의 글과 문체를 마주하는 인용과 차용을 교차한다. 이는 글쓰기의 몽타주이다. 상대의 주제의식과 문체를 참조하는 또 다른 작업으로서의 평론은 대상을 단초 삼아 작가가 구축한 다차원적 세계를 대화적 언어로 옮긴다. 이는 장보윤이 앞서 사진과 영화, 수필과 소설을 오가며 매체를 확장하는 작업, 특별한 복합체를 설계하는 작업에서 일관되게 이어오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한다.

# Crying 03
울고 싶다. 정갈한 이미지와 독대하는 방 한편에서 소리내는 결심을 찾는다. 그 몫은 신부와 신자 사이 고해성사를 닮아 오로지 진실과 가까운 자리에 주어진 것이다. 수사(修辭)는 지운다. 문장은 비운다. 태엽이 반복해서 감아지고 풀어지는 움직임을 따르는 누군가에게 울음은 목적지에 다다르는 기억과 동행한다. 단정한 낭독자를 상대하는 시선 여럿이 흔들리는 몫을 구한다. 다시 울고 싶다.

# Critics 02
낭독자가 블랙 베일 원고 가운데 문장 몇몇을 읽기 전까지의 시퀀스는 장보윤이 블랙 베일 원고 서두에서 작업 전반을 소개하는 문장과 행간을 필름의 고유 언어로 번안한 것이다. 도입부는 대사와 배우 사이 연관성을 유별히 강조하기보다 작가가 출연자와 감상자 양 측에 바라는 특정한 태도를 주문하는 지시문일 듯 싶다. 연기를 연기로 보는 감상, 배우가 인물 감정이입과 거리두는 표현을 연출한다. 이러한 도입 설정은 낭독자가 자신과 대사 속 인물을 분리하는 일종의 와싱(washing, 배우가 극중 역할을 연기하기 이전 역할을 잊는 과정) 절차로 보인다. 배우는 이제 영화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되어가야만 한다.
위와 같은 방식은 블랙 베일에서 장보윤이 무대 내부와 외부, 극과 제4의 벽 너머가 서로에게 연계하는 여타 장치와 연동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또 다른 연출은 출연자가 프레임 내화면에서 외화면 촬영자 혹은 스크린 너머 관객과 눈 마주치는 시선 처리다. 녹음실 조명 아래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서 출연자가 대사를 낭독하는 인위적인 환경은 감상자가 연기자에게 감정이입하기보다 그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조건에 적합한 기록 행위다. 장소와 인물을 표현하는 무대 디자인이나 배우 분장 없이 서사 바깥인 현실의 녹음실에서 배우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보윤은 서사를 이끌어가는 개인 자체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지 비의도적으로 출연자의 발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미지는 발 없는 유령이다.

# Crying 04
하모니카는 운다.
타지에서 고향을 기억하는 그리움에 아물지 않는 계곡을 메운다.
애도하는 자리가 밀려나는 산자락에 여물지 않는 사과를 세운다.

# Curating 04
하모니카 연주자와 자막이 서로 다른 비디오 채널에 각각 등장한다. 자막은 ‘블랙 베일’ 원고에서 아티클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문득 하모니카 연주에서 운율의 여백이 역사의 그것과 닮아 보인다. 알려진 역사와 가려진 진실을 가로지르는 하모니카는 종국에 작금의 평안이 빚인 선대의 희생과 그 애절함으로 현재를 적신다.

# Curating 05
대본 앞에서 흔들리는 동공과 손짓은 배우가 이야기 속 인물을 연기한 것인지 이야기 밖 배우의 솔직한 반응인지 모호하다. 소리와 몸짓을 담는 마이크와 렌즈 앞에서 그는 누구를 연기하는가. 서사 속 내부자인가, 혹은 외부자인가. 방음실과 인물만 남은 실존적 문제 가운데 인물은 언제나 마이크 뒤에 있고, 목소리는 화면 바깥에 위치한 관객을 향한다.

# Critics 03
연기자의 표현이 적극적일 수록 어떠한 부재함, 공허한 역설을 강조한다. 공허한 역설은 매체와 이미지 사이 숙명이다. 스크린과 출력물 너머 이미지는 그것을 마주하는 인간에게 과거의 것이자 현재에 경험하는 대상이다. 이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발화하지 못한 자가 마침내 입을 연다. 일과 사랑은 왜 이토록 가까울까. 띄엄띄엄 전진하는 글쓰기에 경건함이 깃든다.

# Critics 04
벽면을 따라 사진이 설치된 현장 공기에서 표류하는 심미성은 불안을 고백한다.

# Curating 06
장보윤이 르네 도말의 미완성 소설과 [마운트 아날로그](Mount Analogue), 어느 폐가에서 버려진 사진과 [밤에 익숙해지며](Acquainted with the Night) 사이를 오갈 때, 기존 작업부터 현재 [블랙 베일]까지 일관되게 이어오는 어떤 특징이 있다.

# Crying 05
글을 비운다. 자리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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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Jang Boyun


검은 너울 너머 낭독하는 울음


(Crying Recital Beyond the Black Veil)


2023년 장보윤에게 보내는 글
백필균


나는 필자입니다. 이미지를 옮기는 글쓰기에서 시각 언어와 문자 언어가 교류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베를린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의 글에서 그곳의 이름을 읽었습니다. 같은 글을 여러 차례 읽은 내게 그곳은 여전히 낯설지만 앞으로 가고 싶은 장소입니다.
이제 블랙 베일에 관한 평론을 적겠습니다.

# Curating 01
나는 본 원고가 출발하는 첫 문장과 문단에서 장보윤의 [블랙 베일 2](2023) 영상물 도입부에 출연자가 쓴 대사 양식 일부를 빌린다. 장보윤이 섭외한 이소영 배우는 해당 시퀀스에서 스스로 슬레이트 박수를 치며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다. 이름, 직업, 경력 등 출연자의 역할 정보와 함께 대본에서의 배경인 베를린과 자신을 잇는 사연-그곳에서 1년 동안 남편과 거주했으며 호감이 남아있음-을 스스로 밝힌다. 이어서 출연자는 ‘블랙 베일’ 대본을 읽겠다고 선언하고 조명은 잠시 암전한다.
뒤이은 대사와 블랙 베일 인쇄물(2023년 부천아트벙커 전시물)은 1963년부터 1980년까지 대한민국 2만여 명이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해 서독으로 파견된 현장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경이, 주남, 한진,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살피는 장보윤이 1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장보윤은 전체 원고를 구성하는 토막 글 마다 성격에 따라 카드(Karte), 포스트-카드(Postkarte), 아티클(Artikel) 이상 세 이름 가운데 하나를 붙인다. 카드는 장보윤이 여러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한 주관적 작문과 어울린다. 포스트-카드는 운율이 흐르는 산문과, 아티클은 보도기사 등 출처가 알려진 자료문과 어울린다. 이는 각 글마다 미리 함유한 특징이라기보다 관계적 성격이다. 역사적 기록에 권위를 반추하는 자료로서, 미시적 서사에 위계를 전복하는 단서로서, 허구적 소설에 진실을 발견하는 도약으로서, 영상 몽타주와 유사하게 서술된 파편 여럿이 병립 나열한다.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하는 예술과 인류학, 분야와 분야를 통섭하는 프로젝트 계보가 나아가는 연장에서 장보윤의 ‘블랙 베일’ 연작은 내서니엘 호손의 소설에서 검은 천을 얼굴에 드리운 목사의 일생처럼 보편적 도덕보다 새로운 심연을 생각하게 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에서 파독 노동자를 조명하는 방법과 형식에 있어서 서로 다른 매체마다 같은 ‘결’을 맞추는 때이다.

# Crying 02
“내가 지금 내 주위를 둘러보니, 아! 모든 사람이 얼굴에 검은 베일을 쓰고 있군요.” 내서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목사의 검은 베일』, 김명수 역(2023), 올리버 북스

# Curating 02
장보윤의 글쓰기는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을 전유한다. 발생한 사건과 사료 너머 사실과 허구가 자유로운 문맥에서 서로 어울리게 하는 방법으로서, 장보윤의 작업은 유효하다. 쇼트와 쇼트를 배열하는 특정한 영화 문법을 따라 글 토막과 토막을 연결하는 편집 기술은 같은 주제의식에 기반한 ‘덩어리’ 여럿이 얽히는 복합체이자 이를 다시 해체하는 산물이다. 그의 실험은 서술 여럿에 또 다른 맥락을 다시 구축한다. 재맥락화는 누군가에게 일종의 기회일 것이다. 기존 체계에 대응하는 민주주의적 태도와 비교적 가깝고자 위와 같은 설계를 참조하는 나 또한 본문을 임의의 세 유형(Crying, Curating, Critics)으로 나눈다. 블랙 베일 원고와 이 본문에서 어떤 문장은 앞서 나눈 유형 둘 이상이 겹치는 교집합에 종속하고, 어떤 문장은 세 유형 어느 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 총합이 이르는 범위를 벗어나는 그것은 해설보다 노래에 가깝다.

# Critics 01
예술에 관한 글쓰기는 이미지를 드러내는 기술로써 대상을 문자 언어로 서술하는 형식에 결백하지 않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빚져있다. 나는 상대가 지닌 특정한 문체-감각 및 인지 영역을 아우르는 독특한 형식-번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옮긴다. 이러한 내 습관과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 일을 그간 유보해왔는데, 이번 평론이 위 질문에 상응하는 답을 찾는 특별한 계기로 나아갈지 지켜보고 싶다. 다른 평론 작업과 아울러 문체를 전이하는 방식을 고민하면서 쓴 아래 본문과 그 형식은 상대의 글과 문체를 마주하는 인용과 차용을 교차한다. 이는 글쓰기의 몽타주이다. 상대의 주제의식과 문체를 참조하는 또 다른 작업으로서의 평론은 대상을 단초 삼아 작가가 구축한 다차원적 세계를 대화적 언어로 옮긴다. 이는 장보윤이 앞서 사진과 영화, 수필과 소설을 오가며 매체를 확장하는 작업, 특별한 복합체를 설계하는 작업에서 일관되게 이어오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한다.

# Crying 03
울고 싶다. 정갈한 이미지와 독대하는 방 한편에서 소리내는 결심을 찾는다. 그 몫은 신부와 신자 사이 고해성사를 닮아 오로지 진실과 가까운 자리에 주어진 것이다. 수사(修辭)는 지운다. 문장은 비운다. 태엽이 반복해서 감아지고 풀어지는 움직임을 따르는 누군가에게 울음은 목적지에 다다르는 기억과 동행한다. 단정한 낭독자를 상대하는 시선 여럿이 흔들리는 몫을 구한다. 다시 울고 싶다.

# Critics 02
낭독자가 블랙 베일 원고 가운데 문장 몇몇을 읽기 전까지의 시퀀스는 장보윤이 블랙 베일 원고 서두에서 작업 전반을 소개하는 문장과 행간을 필름의 고유 언어로 번안한 것이다. 도입부는 대사와 배우 사이 연관성을 유별히 강조하기보다 작가가 출연자와 감상자 양 측에 바라는 특정한 태도를 주문하는 지시문일 듯 싶다. 연기를 연기로 보는 감상, 배우가 인물 감정이입과 거리두는 표현을 연출한다. 이러한 도입 설정은 낭독자가 자신과 대사 속 인물을 분리하는 일종의 와싱(washing, 배우가 극중 역할을 연기하기 이전 역할을 잊는 과정) 절차로 보인다. 배우는 이제 영화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되어가야만 한다.
위와 같은 방식은 블랙 베일에서 장보윤이 무대 내부와 외부, 극과 제4의 벽 너머가 서로에게 연계하는 여타 장치와 연동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또 다른 연출은 출연자가 프레임 내화면에서 외화면 촬영자 혹은 스크린 너머 관객과 눈 마주치는 시선 처리다. 녹음실 조명 아래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서 출연자가 대사를 낭독하는 인위적인 환경은 감상자가 연기자에게 감정이입하기보다 그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조건에 적합한 기록 행위다. 장소와 인물을 표현하는 무대 디자인이나 배우 분장 없이 서사 바깥인 현실의 녹음실에서 배우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보윤은 서사를 이끌어가는 개인 자체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지 비의도적으로 출연자의 발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미지는 발 없는 유령이다.

# Crying 04
하모니카는 운다.
타지에서 고향을 기억하는 그리움에 아물지 않는 계곡을 메운다.
애도하는 자리가 밀려나는 산자락에 여물지 않는 사과를 세운다.

# Curating 04
하모니카 연주자와 자막이 서로 다른 비디오 채널에 각각 등장한다. 자막은 ‘블랙 베일’ 원고에서 아티클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문득 하모니카 연주에서 운율의 여백이 역사의 그것과 닮아 보인다. 알려진 역사와 가려진 진실을 가로지르는 하모니카는 종국에 작금의 평안이 빚인 선대의 희생과 그 애절함으로 현재를 적신다.

# Curating 05
대본 앞에서 흔들리는 동공과 손짓은 배우가 이야기 속 인물을 연기한 것인지 이야기 밖 배우의 솔직한 반응인지 모호하다. 소리와 몸짓을 담는 마이크와 렌즈 앞에서 그는 누구를 연기하는가. 서사 속 내부자인가, 혹은 외부자인가. 방음실과 인물만 남은 실존적 문제 가운데 인물은 언제나 마이크 뒤에 있고, 목소리는 화면 바깥에 위치한 관객을 향한다.

# Critics 03
연기자의 표현이 적극적일 수록 어떠한 부재함, 공허한 역설을 강조한다. 공허한 역설은 매체와 이미지 사이 숙명이다. 스크린과 출력물 너머 이미지는 그것을 마주하는 인간에게 과거의 것이자 현재에 경험하는 대상이다. 이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발화하지 못한 자가 마침내 입을 연다. 일과 사랑은 왜 이토록 가까울까. 띄엄띄엄 전진하는 글쓰기에 경건함이 깃든다.

# Critics 04
벽면을 따라 사진이 설치된 현장 공기에서 표류하는 심미성은 불안을 고백한다.

# Curating 06
장보윤이 르네 도말의 미완성 소설과 [마운트 아날로그](Mount Analogue), 어느 폐가에서 버려진 사진과 [밤에 익숙해지며](Acquainted with the Night) 사이를 오갈 때, 기존 작업부터 현재 [블랙 베일]까지 일관되게 이어오는 어떤 특징이 있다.

# Crying 05
글을 비운다. 자리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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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Lee Yeonsook






LBDF 프로젝트에서 작가 A(당시 익명, 장보윤)가 추천한 도서 목록은 비공개 상태로 비평가 B(이연숙)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비평가 B였던 이연숙은 오직 이 도서 목록만을 단서로 삼아 작가 A였던 장보윤의 세계관을 탐구하고 추측하는 비평문을 집필했습니다.

작가A가 남긴 책들의 목록


(비평가 B의 개인적인 메모가 추가된 버전)
이연숙 (리타)


박스의 포장을 뜯고 책을 받아 든 순간, 곧장 두려움과 후회. 책의 가짓수가 많고 두꺼울 뿐더러 대부분이 영어로 쓰여져 있다. 왜 이 책들을 선택했을까?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책들을 골랐어야 했다. 즉각 ‘읽어’ 낼만 한 종류의 책들이 아니다. 애초에 이 기획에 매력을 느낀 이유가 바로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책상 위에서 데면데면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책들에게,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응수하고 싶어 진다. 글을 시작하기에는 어딘가 준비가 덜 된, 어정쩡한 포즈.


1. 모이라 데이비 Moyra Davey, 『이 일기를 태워라 Burn the Diaries』


제목에 끌린다. 나와 동류의 냄새가 난다. 여성-소수자들의 글쓰기 전통에서 일기는 다른 모든 종류의 글쓰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아무리 장르화되었다 한들 일기는 여전히 나와 ‘다른’ 삶이라는 최소한의 진리를 보존하고 유출하는 형식이므로. 한편 그게 무엇이 되었든 불태우려는 사람은 의심스럽다. (중략) 목숨보다 중요한 비밀들.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 모이라 데이비는 사진, 비디오, 글쓰기를 자기 작업의 주된 매체로 사용한다. 특히 이 책은 2014년 비엔나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작가의 전시와 함께 발행된 일종의 카탈로그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그는 장 주네의 글쓰기와 함께 자기 삶의 특정한 장면들을 교차시킨다.

그의 사진은 책 속에서 접힌 자국, 우표와 주소, 색깔 있는 테이프가 붙여진 흔적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다. (중략) 또한 그의 출산 경험은 매리 켈리의 <산후 기록>과 에이드리언 리치의 ‘어머니됨’에 대한 에세이들을 통해 쾌락적인 지식으로 재구성되었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접근이다. 사실 나는 표면을 더듬는 것보다는 그것 위에서 뒹구는 것을 더 선호한다. 더듬는 것은 내게 너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런데 모이라 데이비의 글과 사진으로부터 감지되는 은근한 백인성이 나의 전투 의지를 거의 상실하게 만든다.


2. 조 레너드 Zoe Leonard, 『결국 내가 여기 왔다는 걸 너는 알겠지 You See I Am Here After All』


이 책을 구글링한 뒤 받은 인상: 2010년대에 국내 미술계에서 때로 발견할 수 있었던, 작은 사실을 수집해 허구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들에 대한 회상. 가 본적 없는 장소에 대한 노스탤지어.


성소수자 인권활동가이자 작가인 조 레너드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글, ‘나는 대통령을 원한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여기 왔다는 걸 너는 알겠지』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재현한 4천여 장의 엽서를 다양한 각도에 따라 수집하고 배열한 작업이다.

놀랍게도 이 책에는 작가 A의 밑줄과 ‘별표’가 남아있다. 작가 A는 조 레너드로부터 무엇을 본 것일까? 나로서는 아직까지 이 작업으로부터 무엇을 봐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작가 A의 글씨체는 가늘고 작고 둥글다. 작은 별이 달린 문장들.


3. 오큘로 2호, “이미지, 먼지와 기념비 사이에서”

오큘로는 2016년 창간한 영상비평 전문지로, 2호의 에디토리얼에서 조지훈 편집자는 "볼 것 없는 이미지들을 보려는 시도는 필경 볼 것 많은 '기념비적인 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 A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이런 맥락을 통해서 읽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4. 사진가의 놀이책 The Photographer's Playbook

307명의 작가들이 말하는 307개의 사진을 찍는 각기 다른 방법에 대한 책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감각은 ‘작가가 하는 것이 곧 작품’이라는 무한한 예술적 자유 또는 방임의 관점으로부터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안정감을 선사한다.


작가 A는 이 책의 몇몇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 놓기도 하고, 색연필로 ‘체크’ 표시를 남기기도 했다. "각각의 이미지는 이전의 이미지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무엇이 추가되어야 한다. 이 선택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5. 소피 칼 Sophie Calle, 『나 봤어? Did You See Me?』

소피 칼이라는 이름은 항상 특정한 장면을 내게 환기시킨다. 예술가의 특권. 끝까지, 이기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자유.

소피 칼의 작업은 대상의 ‘원본성’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그것은 단지 ‘부재’로만 드러날 수 있음을 폭로하는 예술적 실천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브 알랭 부아의 말처럼, 그는 먼지인 동시에 기념비인 “종이 호랑이”로서 동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위를 떠맡았다.



1. Moyra Davey, Burn the Diaries, ICA, University of Pennsylvania, 2014, 8p.

2. Moyra Davey by Elisabeth Lebovici, BOMB Magazine, 2014.

3. Zoe Leonard: You see I am here after all by Marc Joseph Berg,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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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Jang Boyun



사진의 바깥


이한범


전시장에 걸린 사진 한 장에 눈길이 갔다. 그건 책장의 한 칸을 찍은 사진이었고, 눈이 가게 된 건 아마도 거기에 꽂힌 책 중 한 권의 책등에 선명하게 한자로 적힌 ‘朝鮮’이라고 하는 글자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 글자는 사진에서 유일하게 로마자가 아닌 글자였고, 또 유일하게 활판 인쇄로 찍힌 글자가 아닌 손으로 적힌 글자였다. 그러고 보면 눈에 띄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 글자는 책등 하단에 위치하고 있었고 다른 글자보다 크기가 훨씬 컸다. 책등 상단에는 “N. Weber Im Lande der Morgen-stille” 라고 적혀 있다. 나는 이 책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 책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다. 내가 알고 있던 제목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는데, 노르베르트 베버라는 독일 베네딕도회의 신부가 1911년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와 약 4개월간 여행하며 텍스트와 이미지로 기록한 조선의 다양한 풍경을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독일어를 조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진 속 책이 바로 그 책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사진 속의 책은 상당히 오래된 것 같았지만 초판본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이 책의 초판본은 1915년에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헤르더 출판사에서 발행되었다.
 
사진 속 서가에는 한국에 관한 책들이 몇 권 더 보였다. 이 서가의 주인은 삶의 어느 구간에서 한국에 대해 조금 궁금해한 적이 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는 독일인 이었을테고. 눈길이 사진의 중앙에 머물다가 천천히 주변으로 맴돌아 나가기 시작하니, 베버의 책이 꽂힌 칸의 바로 아래칸에 한국어 책들이 꽂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등의 위쪽 끝부분만 조금 나왔지만, ‘삼’, ‘나’같은 한글이 보인다. 한글로 만들어진 책들의 제목이 뭘지, 무슨 책일지 나는 무척 궁금했지만 사진만으로는 알아낼 도리가 더는 없었다. 다만, 이 책장이 놓인 집 그 공간에는 어쩌면 독일인과 한국인이 함께 살고 있거나 살았던 적이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 그것 말고는 구체적인 다른 무언가를 더는 알 수 없었다.
이 사진은 내가 장보윤의 ⟪블랙베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의 전시장에서 비교적 읽어낼 것이 많았던 사진 중 하나였다. 거기에는 내가 이미 무언가 조금 알고 있는 사물과 언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진들에 대해서라면 당장은 길게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덩그러니 놓인 하모니카, 읽을 수 없는 필기체 글자가 적힌 오래된 책의 첫 페이지, 가지런하고 단정한 유럽식 건축의 안팎, 어딘지 모를 도시의 풍경. 그리고 최근에 찍은 것 같지는 않은, 지난 시절의 사람들이 찍힌 오래된 사진들. 이 사진들의 피사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거기에 어떤 이야기가 얽혀 있는지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진이 비밀을 품고 있으니 비밀에 다가서라고, 다가서서 비밀을 풀어보라고 요구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블랙베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가 어떤 사람의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사진들이 모두 어떤 사람의 삶 혹은 사건과 관련됐을 법한 흔적들 혹은 남은 것들이라는 시간의 감각을 환기시켰기 때문이었다.  남은 것은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기억시켜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엇이 사라져 이제 더는 다가갈 수 없는지도 알려준다. 남은 것은 언제나 남은 것을 둘러싼 세계에 관한 하나의 암시이다.
 
그렇다고  ⟪블랙베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가 서로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이러저러하게 배치해보며 연관성을 추적하는 형사들의 수사 현황판을 닮은 것은 아니었다. 장보윤의 재구성 작업이란 불확실하고 불투명했던 것을 선명하게 한다거나 잡히지 않던 것을 잡히도록 해주는 그런 종류의 물질화는 아니다. 그보다는 누군가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의지 속에서 대상의 불투명함을, 잡으려 할 때마다 뒤로 물러나 결코 잡히지 않는 불가능성을 다룬다고 하는 편이, 그리고 그 불가능성으로부터 비롯하는 픽션들을 길러낸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러니 사진들의 배치가 무엇을 재구성하고 있는가 묻기 보다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어떤 공간이 자라나고 있는지를 묻는 편이 낫다. 거기에는 차이들만이, 차이들 사이의 아주 좁은 간격들만이 놓인다. 사진을 보던 나의 눈길이 더 바깥으로 맴돌아 나갔을 때, 내게 보였던 것은 사진의 들뜸이었다. 액자로 프레이밍 된 사진들은 액자 속 패널에 부착되어 있긴 했지만 완전히 평평하게 달라붙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인쇄된 이미지와 배경 사이에는 아주 얇고 미묘하게 벌어진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공간에는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눈길이 사진의 바깥으로 맴돌아 나간 것은 나의 의식적인 관람 과정이었다기보다는 그 공간의 존재감이 나의 눈길을 이끌고 갔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장보윤이 사진으로서 보여주는 사진적 이미지는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그 가장자리의 공간까지이고, 그곳이 무수한 이야기의 자리가 된다.
 
장보윤은 <밤에 익숙해지며>(2015)나 <다시 이곳에서: 마운트 아날로그>(2016)에서 그러했듯 언제나 자리를 만드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곳에 자립할 수 있는 가능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 보는 일을 한다. 글을 쓴다고 했지만 사실은 텅 빈 공간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투신하고 그곳과 얽혀 가는 일에 가깝다. 나는 이 지점에서 어떤 배움을 얻게 되는데, 그건 픽션 만들기에 있어서 몸의 이동, ‘그곳으로 감’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볼 수 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보윤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이미지-없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만들어주는 텅 빈 자리의 픽션을 회복하기 위해 길 위에 있는 거라고. 나는 이것이 사진을 매체로 다루는 작가로서 장보윤의 예술적 실천이 가지는 독특하고 고유한 측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사진으로 담거나, 사진의 배치를 통해 사진 바깥의 무언가를 등장시키는 것을 넘어, 사진이 만드는 사진 바깥의 빈 공간에 자기 자신의 글쓰기로서 가능한 이야기를 실체화 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공간을 채우고 서사를 구축하려는  열망이 아니라 그 공간을 이루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의 간격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자, 또 다른 이야기들의 출현이 가능하도록 하는 자리 만들기의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작가는  ⟪블랙베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설명한다. “파독 간호사에 대한 이해는 이미 우리 사회의 근현대사라는 거대 서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기록이 지금까지 연구되어 왔으나 동시에 이미 잊혀가고 있다. 하지만 공식화된 서사의 그림자에는 조각조각 나서 서로 이가 맞지 않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이 작업은 역사와 개인, 기록과 기억 사이에서 잃어버렸던 푸티지를 발견하거나 혹은 만들어내는 과정이었으면 했다. 물론 그것은 작업의 의도와 기획의 일부일 뿐 그 과정을 완성하는 것은 작업을 마주한 이들의 몫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기록과 기억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기록과 기억에 의한 서사가 어떤 방식으로 불충분함을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기록되고 기억된다면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겠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잊히는 것에 대해서 작가는 더 오랫동안 생각해왔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잊힘에 대해서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야기를 건져 내는 일일까? 장보윤에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일인 것 같다. 그것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자리에서 여러 이질적인 이야기들이 존재할 수 있는 관계의 양식들을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로 어긋나고 합의되지 않는 경합들이 가능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을 말이다. 이것이 장보윤의 작업에서 픽션이라는 용어가 가진 중층적인 의미다.
 
전시장에 놓인 책자 속 「블랙 베일」은 여러 실로 직조된 직물과 같은 텍스트다. 이 텍스트는 크게 보면 [기록하는 자]와  [픽션 셀] 두 가지 다른 이야기로 짜여 있다. [기록하는 자]는 이 프로젝트를 만들어 가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화자가 파독 간호사였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머물렀던  장소를 찾아가고,  어머니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는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독자는 [기록하는 자]의 내용을 통해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 흐름을, 작가가 누구와 만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또 전시장에 놓인 사진들이 어떤 편린들인지  천천히 이해해나갈 수 있다.  [픽션 셀]은 다시 각각 주남, 경이, 인주, 한진이라는 인물의 관점에서 쓴 각각의 다른 이야기로 나뉜다. 네 인물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파독 간호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네 인물의 이야기는 [기록하는 자]로서는 알지 못하거나 닿을 수 없는 삶의 구체성들로 부풀려져 있다. 조금 더 세심하게 말하면, 이 구체성들은 견고한 모든 것들이 아니라 견고하지 않은 모든 것들, 분위기나 감정, 흩어지는 말과 끊임없이 일렁이는 관계 같은 것들이다. 누구도 무엇으로도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할 수 없는 그런 것들 말이다. 작가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기록하는 자]와 [픽션 셀] 이외에도, 「블랙 베일」에는 여러 다양한 텍스트 파편들이 틈입해 있다. 그것은 대부분 인용된 텍스트들인데, 파독 간호사와 관련된 시대적인 자료도 있고 문학의 한 부분들도 있다. 이들은 여러 이야기들의 사이를 연결해주기도 하고, 이야기로부터 독자를 빼 내어주기도 한다. 내가 이 텍스트가 직물과도 같다고 한 이유는 각각의 부분들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며 하나의 흐름을 찾아나기 때문이다.
 
[기록하는 자]의 이야기는 시작보다 더 이전의 시점부터 시작하고, 화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록, 어딘가로 더 멀리 떠날수록,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갈수록, 묻혀 있던 사물과 이미지들을 발견할수록 [픽션 셀]의 이야기는 더욱 내밀해진다. 그리고 이 픽션의 여정이 흘러감에 따라 이야기의 부분들은 단단히 얽힌다. 어느 순간 [기록하는 자]와 [픽션 셀]의 이야기가 허구나 실제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서사가 고조되어간다거나 이야기가 완성되어가는 것이기보다는 알 수 없는 깊이의 깊고 어두운 동굴로 천천히 침잠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이야기는 나아가지만 어두움은 끝이 없고 밝혀지지 않는다. “나는 파독 간호사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다른 사람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기록하는자]의 열여섯 번째 조각글)는 화자의 말은 이 여정이 이야기의 결말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장소를 정처없이 항해하며 그 세계의 조류를 따라 방랑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내가 「블랙 베일」이 직물같다고 말한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지 않고 끊임없는 짜임으로만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사진들, 그리고 책과 함께 ⟪블랙베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를 구성하는 영상 <블랙 베일 낭독 시리즈>는 [픽션 셀]의 내용과 닮은 스크립트를 낭독하는 두 연기자의 모습을 각각 촬영한 작업이다. 한 명은 독일에서, 다른 한 명은 인도에서 한국으로 와 살고 있는 외국인으로, 그들은 한국어를 잘 하지만 충분히 잘 하지는 않는다. 두 연기자는 모두 같은 스크립트를 낭독하며 그 옛날 한국에서 독일로 이주한 노동자의 삶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입한다. 그리고 영상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차이이다. 글로 쓰인 텍스트는 같다 하더라도 그것은 두 연기자를 통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산출된다. [픽션 셀]이 네 명의 서로 다른 파독 간호사들을 통해 서로 다른 미시적인 삶의 모습을 상상했다면, <블랙 베일 낭독 시리즈>는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 발화를 통해 차이들을 발견한다. 결국 작가가 사진의 가장자리에, 사진의 모서리에 붙어 있지만 결코 그것으로부터 멀지 않은 바깥에 놓으려고 했던 것은 무수한 차이들의 픽션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리는 작가 자신의 영토로만 남는 곳은 결코 아닐 것이다. 
 
 「블랙 베일」의 처음과 끝에는, 이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노르베르트 베버의 책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주남의 시점으로 쓰인 [픽션 셀]의 다섯 번째 조각글에 나오는데, 주남은 독일인 남자와 결혼하지만 그 남자가 이내 죽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타국에서 미망인으로 살게 된 사람이다. 여기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죽은 독일인 남편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 그 책을 우연히 헌책방에서 샀다고 했다. 까만 머리의 검은 눈을 가진 나를 만날 것을 예견한 책이라며, 그는 그 책을 가리키며 환하게 웃어 보이곤 했다.” 다른 하나는 [기록하는 자]의 스무 번째 조각글에 나오는 것으로, 함부르크에서 만난 파독 간호사 양순 선생님과의 대화 중 그녀의 남편이 한국인 부인을 만나면서 생긴 관심으로 구하게 됐다며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는 장면이다. 전시장에 놓였던 사진의 진실은 두 이야기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이 질문은 아마도 여기서는 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우선 그 사진의 바깥에, 적어도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적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