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너울 너머 낭독하는 울음


2023년 장보윤에게 보내는 글 — 백필균

#Crying 01





나는 필자입니다. 이미지를 옮기는 글쓰기에서 시각 언어와 문자 언어가 교류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베를린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의 글에서 그곳의 이름을 읽었습니다. 같은 글을 여러 차례 읽은 내게 그곳은 여전히 낯설지만 앞으로 가고 싶은 장소입니다. 이제 블랙 베일에 관한 평론을 적겠습니다.

나는 본 원고가 출발하는 첫 문장과 문단에서 장보윤의 [블랙 베일 2](2023) 영상물 도입부에 출연자가 쓴 대사 양식 일부를 빌린다. 장보윤이 섭외한 이소영 배우는 해당 시퀀스에서 스스로 슬레이트 박수를 치며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다. 이름, 직업, 경력 등 출연자의 역할 정보와 함께 대본에서의 배경인 베를린과 자신을 잇는 사연-그곳에서 1년 동안 남편과 거주했으며 호감이 남아있음-을 스스로 밝힌다. 이어서 출연자는 ‘블랙 베일’ 대본을 읽겠다고 선언하고 조명은 잠시 암전한다.

뒤이은 대사와 블랙 베일 인쇄물(2023년 부천아트벙커 전시물)은 1963년부터 1980년까지 대한민국 2만여 명이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해 서독으로 파견된 현장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경이, 주남, 한진,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살피는 장보윤이 1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장보윤은 전체 원고를 구성하는 토막 글 마다 성격에 따라 카드(Karte), 포스트-카드(Postkarte), 아티클(Artikel) 이상 세 이름 가운데 하나를 붙인다. 카드는 장보윤이 여러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한 주관적 작문과 어울린다. 포스트-카드는 운율이 흐르는 산문과, 아티클은 보도기사 등 출처가 알려진 자료문과 어울린다. 이는 각 글마다 미리 함유한 특징이라기보다 관계적 성격이다. 역사적 기록에 권위를 반추하는 자료로서, 미시적 서사에 위계를 전복하는 단서로서, 허구적 소설에 진실을 발견하는 도약으로서, 영상 몽타주와 유사하게 서술된 파편 여럿이 병립 나열한다.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하는 예술과 인류학, 분야와 분야를 통섭하는 프로젝트 계보가 나아가는 연장에서 장보윤의 ‘블랙 베일’ 연작은 내서니엘 호손의 소설에서 검은 천을 얼굴에 드리운 목사의 일생처럼 보편적 도덕보다 새로운 심연을 생각하게 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에서 파독 노동자를 조명하는 방법과 형식에 있어서 서로 다른 매체마다 같은 ‘결’을 맞추는 때이다.


#Crying 02





“내가 지금 내 주위를 둘러보니, 아! 모든 사람이 얼굴에 검은 베일을 쓰고 있군요.”




#Curating 02
장보윤의 글쓰기는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을 전유한다. 발생한 사건과 사료 너머 사실과 허구가 자유로운 문맥에서 서로 어울리게 하는 방법으로서, 장보윤의 작업은 유효하다. 쇼트와 쇼트를 배열하는 특정한 영화 문법을 따라 글 토막과 토막을 연결하는 편집 기술은 같은 주제의식에 기반한 ‘덩어리’ 여럿이 얽히는 복합체이자 이를 다시 해체하는 산물이다. 그의 실험은 서술 여럿에 또 다른 맥락을 다시 구축한다. 재맥락화는 누군가에게 일종의 기회일 것이다. 기존 체계에 대응하는 민주주의적 태도와 비교적 가깝고자 위와 같은 설계를 참조하는 나 또한 본문을 임의의 세 유형(Crying, Curating, Critics)으로 나눈다. 블랙 베일 원고와 이 본문에서 어떤 문장은 앞서 나눈 유형 둘 이상이 겹치는 교집합에 종속하고, 어떤 문장은 세 유형 어느 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 총합이 이르는 범위를 벗어나는 그것은 해설보다 노래에 가깝다.


#Critics 01





예술에 관한 글쓰기는 이미지를 드러내는 기술로써 대상을 문자 언어로 서술하는 형식에 결백하지 않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빚져있다. 나는 상대가 지닌 특정한 문체-감각 및 인지 영역을 아우르는 독특한 형식-번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옮긴다. 이러한 내 습관과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 일을 그간 유보해왔는데, 이번 평론이 위 질문에 상응하는 답을 찾는 특별한 계기로 나아갈지 지켜보고 싶다. 다른 평론 작업과 아울러 문체를 전이하는 방식을 고민하면서 쓴 아래 본문과 그 형식은 상대의 글과 문체를 마주하는 인용과 차용을 교차한다. 이는 글쓰기의 몽타주이다. 상대의 주제의식과 문체를 참조하는 또 다른 작업으로서의 평론은 대상을 단초 삼아 작가가 구축한 다차원적 세계를 대화적 언어로 옮긴다. 이는 장보윤이 앞서 사진과 영화, 수필과 소설을 오가며 매체를 확장하는 작업, 특별한 복합체를 설계하는 작업에서 일관되게 이어오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한다.



# Crying 03





울고 싶다. 정갈한 이미지와 독대하는 방 한편에서 소리내는 결심을 찾는다. 그 몫은 신부와 신자 사이 고해성사를 닮아 오로지 진실과 가까운 자리에 주어진 것이다. 수사(修辭)는 지운다. 문장은 비운다. 태엽이 반복해서 감아지고 풀어지는 움직임을 따르는 누군가에게 울음은 목적지에 다다르는 기억과 동행한다. 단정한 낭독자를 상대하는 시선 여럿이 흔들리는 몫을 구한다. 다시 울고 싶다.



#Critics 02





낭독자가 블랙 베일 원고 가운데 문장 몇몇을 읽기 전까지의 시퀀스는 장보윤이 블랙 베일 원고 서두에서 작업 전반을 소개하는 문장과 행간을 필름의 고유 언어로 번안한 것이다. 도입부는 대사와 배우 사이 연관성을 유별히 강조하기보다 작가가 출연자와 감상자 양 측에 바라는 특정한 태도를 주문하는 지시문일 듯 싶다. 연기를 연기로 보는 감상, 배우가 인물 감정이입과 거리두는 표현을 연출한다. 이러한 도입 설정은 낭독자가 자신과 대사 속 인물을 분리하는 일종의 와싱(washing, 배우가 극중 역할을 연기하기 이전 역할을 잊는 과정) 절차로 보인다. 배우는 이제 영화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되어가야만 한다.








위와 같은 방식은 블랙 베일에서 장보윤이 무대 내부와 외부, 극과 제4의 벽 너머가 서로에게 연계하는 여타 장치와 연동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또 다른 연출은 출연자가 프레임 내화면에서 외화면 촬영자 혹은 스크린 너머 관객과 눈 마주치는 시선 처리다. 녹음실 조명 아래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서 출연자가 대사를 낭독하는 인위적인 환경은 감상자가 연기자에게 감정이입하기보다 그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조건에 적합한 기록 행위다. 장소와 인물을 표현하는 무대 디자인이나 배우 분장 없이 서사 바깥인 현실의 녹음실에서 배우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보윤은 서사를 이끌어가는 개인 자체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지 비의도적으로 출연자의 발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미지는 발 없는 유령이다.



#Crying 04



하모니카는 운다.

타지에서 고향을 기억하는 그리움에 아물지 않는 계곡을 메운다.

애도하는 자리가 밀려나는 산자락에 여물지 않는 사과를 세운다.




#Curating 04





하모니카 연주자와 자막이 서로 다른 비디오 채널에 각각 등장한다. 자막은 ‘블랙 베일’ 원고에서 아티클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문득 하모니카 연주에서 운율의 여백이 역사의 그것과 닮아 보인다. 알려진 역사와 가려진 진실을 가로지르는 하모니카는 종국에 작금의 평안이 빚인 선대의 희생과 그 애절함으로 현재를 적신다.



#Curating05





대본 앞에서 흔들리는 동공과 손짓은 배우가 이야기 속 인물을 연기한 것인지 이야기 밖 배우의 솔직한 반응인지 모호하다. 소리와 몸짓을 담는 마이크와 렌즈 앞에서 그는 누구를 연기하는가. 서사 속 내부자인가, 혹은 외부자인가. 방음실과 인물만 남은 실존적 문제 가운데 인물은 언제나 마이크 뒤에 있고, 목소리는 화면 바깥에 위치한 관객을 향한다.


#Critics 03





연기자의 표현이 적극적일 수록 어떠한 부재함, 공허한 역설을 강조한다. 공허한 역설은 매체와 이미지 사이 숙명이다. 스크린과 출력물 너머 이미지는 그것을 마주하는 인간에게 과거의 것이자 현재에 경험하는 대상이다. 이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발화하지 못한 자가 마침내 입을 연다. 일과 사랑은 왜 이토록 가까울까. 띄엄띄엄 전진하는 글쓰기에 경건함이 깃든다.



#Critics 04





벽면을 따라 사진이 설치된 현장 공기에서 표류하는 심미성은 불안을 고백한다.



#Curating 06





장보윤이 르네 도말의 미완성 소설과 [마운트 아날로그](Mount Analogue), 어느 폐가에서 버려진 사진과 [밤에 익숙해지며](Acquainted with the Night) 사이를 오갈 때, 기존 작업부터 현재 [블랙 베일]까지 일관되게 이어오는 어떤 특징이 있다.



>#Crying 05
글을 비운다. 자리를 남긴다.







[i] 내서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목사의 검은 베일』, 김명수 역(2023), 올리버 북스